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지사와 히데유키 (문단 편집) == 생애 == 1977년 제1회 기성(棋聖)전에서 하시모토 우타로를 꺾고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가토 마사오]], [[이시다 요시오]], [[린하이펑]], [[오타케 히데오]] 등을 물리치고 6연패에 성공해 60세 이상 혹은 은퇴 후에 '''명예 기성''' 칭호를 쓸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후지사와는 당시 [[알코올 중독|알코올 의존증]] 상태였는데 매년 기성전을 앞두고는 죽을 각오로 술을 끊어 금단 증상[*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사지를 덜덜 떨면서 바둑판을 들여다 보았고 피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환각을 보았기에 팔과 가슴을 벅벅 긁었다고 한다.]에 시달리면서 타이틀을 방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50대'''라는 나이에 저런 결과를 낸 것이다. 흔히 아는 것처럼 30대부터 서서히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좋아도 40대까지가 전성기인 바둑 기사로서 고령의 나이임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박한 상황에 목숨이라도 걸고 기성전 상금을 노렸다지만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데 괜히 괴물이라 불린 것이 아니다.] [[기성전]]은 현재 일본 서열 1위 기전으로, 일본의 바둑계는 기전 서열이 상금순에 따라 엄격하게 정리되어 있다. 현재 3대 기전은 1위 기성전(우승 상금 4500만엔), 2위 명인전(3000만엔), 3위 혼인보전(2800만엔)인데, 재미있게도 기전 역사는 기성전이 가장 짧고 혼인보전이 가장 길다. 일본에서 신문기전이 본격화될 당시 기전 랭킹1위는 명인전이었다. 명인전 개최권을 두고 신문사들이 분쟁이 벌어졌는데, 요미우리 신문이 개최 경쟁에서 패하자 새롭게 최고의 기전으로 만들겠다고 쇼 미 더 머니를 시전하며 런칭한 것이 바로 기성전. 당대 기성전은 타 기전과는 달리 도전자결정전 등을 도입해 참신한 반응을 얻었고, 무엇보다 상금의 규모가 넘사벽으로 큰지라 단숨에 1위 기전의 위상을 획득했다. 한편 후지사와 슈코는 별명 중에 '새 것을 따먹는 슈코'가 있을 정도로 신규 기전에 유난히 강했는데[* 후지사와가 따낸 타이틀 15개 중에서 제1기에 우승한 것이 5개나 되었다고 한다.] 기성전 런칭 당시 슈코는 마작, 도박, 경마, 경륜 등 때문에 파산 직전이었지만 기적적인 기성전 우승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재밌는 것은 일본 바둑 기사간의 서열 역시 무슨 기전을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슈코가 기성전을 6연패 하는 동안 일본 바둑계의 1인자는 누가 얼마나 타이틀을 보유했든 후지사와 슈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슈코의 기성전 6연패 과정에서 한 번은 최종국에서 반집으로 승리한 적이 있었고 오다케 9단은 이를 "1억 엔짜리 반집"이라고 표현했다. '단순히 반집을 이김으로 우승 상금만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기의 대국이 확보되고, 일본 바둑계의 1인자라는 지위까지 유지'하는 가치가 1억 엔 정도는 된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창호 이후로 반집까지 계산하는 정밀한 형세 판단은 정상급 기사들의 필수 덕목이였지만, 그 이전에는 반집으로 이기는 것은 운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슈쿄의 반집승은 더욱 값진 것이다.] 1983년 [[조치훈]]에게 3연승 후 4연패하며 기성 타이틀을 잃었다. 후지사와 九단은 "나는 1년에 4번만 이기면 된다."[* 기성전은 7전 4선승제다. 7번기라고도 한다. 즉, '나는 1년 동안 기성전 하나만 따내면 된다.'는 의미.]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기성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였는데, 조치훈이 20대의 젊은 나이에 일본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자 "조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내가 한 번 찾아가 봐야겠군."[* 조치훈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전에서 도전자에 올라가야겠군.]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조치훈은 "대선배님을 어떻게 찾아오시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대선배님이 갖고 계신 기성전의 도전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후지사와는 조치훈 기성전 전야제에서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 4:0으로 이겨 주겠다.]라고 했고, 조치훈은 이 말에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 세 판만 져 주고 4판을 이기겠다.]라고 대꾸하고는 진짜로 '''[[리버스 스윕]]'''에 성공했다. 심지어 조치훈은 "선배님의 기성위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라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성 타이틀을 다시 따지 못했고, 심지어 타이틀 도전기에조차 올라오지 못했다.''' 물론 고령의 나이임을 감안하면 기성 타이틀을 가졌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긴 하다. 훗날 조치훈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명인 타이틀 보유자라는 명예가 있는데 4:0으로 지면 꼴사나우니 나중에 지더라도 1승 이상은 따보자."'''는 생각으로 제4국에 초집중하며 임했는데 이게 잘 먹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후지사와는 [[위암]]이 발견돼 절제 수술을 받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성 림프종, 전립선암 등 암을 3번 극복했다. 1988년 [[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제1회 응씨배]]에 출전해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당시 상대가 바로 철의 수문장이라 불리던 '''녜웨이핑.''' 치열한 접전 끝에 반집 차이로 아깝게 2번 패배하고 만다. 녜웨이핑은 대국이 끝나고 "슈코 선생이 10년만 젊었어도 내가 졌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6855534#home|#]] 당시 나이가 '''63세'''로 나이 제한 없는 세계 대회 4강 이상 진출자 중에서는 최고령이었고,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91년 하네 야스마사를 상대로 3-1로 승리하면서 왕좌 타이틀을 획득했고, 이듬해 [[고바야시 고이치]]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사상 최고령('''67세''') 타이틀 방어 기록을 세웠다. ~~[[노익장]]~~ 1999년 창하오, [[조훈현]], [[다카오 신지]]와 은퇴 3번기를 뒀는데 은퇴 대국은 1938년 혼인보 슈사이 - [[기타니 미노루]] 이후 처음이었다. 2009년 5월 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